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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일반부/생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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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만남


박 종 찬

이번엔 지독히도 운이 없었다. 39도를 웃도는 이 기록적인 폭염에 예비군 훈련이라니. 그것도 4일씩이나. 오 신이시여 이 불쌍한 어린 양을 노릇하게 익히려 하십니까. 이런 일이 으레 그렇듯 통보는 늘 급작스럽다. 문자 한통 달랑. 언제부터 언제까지, 또 이날부터 저 날까지 이렇게 세 가지 훈련 기간이 있는데 너는 이때 오면 된다. 혹시라도 그때가 안 되면 그 뒤쪽 일정 하나로 바꿀 수는 있다. 전형적인 행정적 어투. 아무렴요. 백수가 안 되는 날이 어디 있겠습니까. 훈련 날이 가까워 올수록 너무 더워서 미루어 볼까 잠깐 고민도 해봤지만 그래봐야 다음 일정도 팔월 초였다. 그땐 정말 죽을지도 몰라. 그리고 만에 하나 그때가 훨씬 시원할 거라 해도, 친절하지도 않은 예비군 웹사이트에 액티브엑스들을 깔아대고 사이트맵 뒤져가며 일정을 바꾸는 귀찮은 짓을 내가 진짜 할 거라고? 나는 나를 잘 안다. 그럴 리가 없지.

실거주지가 서울임에도, 지금은 서류상 주소지가 본가가 있는 공주로 되어 있는 바람에 이번 훈련장은 집 근처 군부대로 잡혔다. 공주로 내려가야 했다. 처음엔 그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참에 집에 갔다가 오는 것도 나쁠 건 없겠다고 이내 마음을 바꿨다.

습관처럼 강남터미널로 향했다. 날이 더워 출발 한참 전에 미리 공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출발 전 형식적으로 안전벨트 착용을 권유하는 기사님의 말에 나 역시 형식적으로 매는 척만 해 주고, 이어폰을 꽂고 창밖을 구경하며 이번 훈련 동안에 혹시 공주에 있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우연히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들 중에 5년 차가 넘어 훈련이 제외되는 경우는 아직 없겠고, 공주에 예비군들 받는 군부대는 한 곳 밖에 없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터였다. 말뿐이 아니라 거긴 정말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좁은 지역사회라서 더욱 가능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기대감을 가질 것도 같은데, 난 기대감보다는 뜻밖의 만남이 주곤 하는 어떤 종류의 난처함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공주를 떠난 탓에, 오래전 친구들과는 지금 대부분 연락이 되지 않는다. 타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애초에 공주에 갈 일 자체가 없다 보니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때만 해도 카카오톡도 없고, SNS도 지금처럼 개인의 필수품이 아닌 시대여서 이젠 책 속에서나 쓸 것 같은 자연스레 멀어진다는 상황이 실제로 가능하던 시대였다. 더구나 고등학교는 기숙사 생활을 하던 학교인 만큼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좋든 싫든 하루 종일 같이 지내다 보니 금세 각별한 사이가 되어 옛 친구들에 전처럼 신경을 많이 쓰지 않게 되기도 했다.

대학을 가면서는 공주에서 더욱 멀어졌고, 그제서야 서로가 선뜻 연락을 먼저 건네기엔 이미 많이 멀어지고 어색해진 상태였다. 막상 별 고민 없이 저질러 봤다면 생각만큼 어렵진 않았을 텐데 그때는 쉽게 그런 마음이 먹어지지 않았다.

긴 시간의 공백이 서로의 사이를 오래 메웠던 만남은 그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정말 어렵다. 애초에 난 살가운 사람이 아닐뿐더러, 한번 이어진 인연을 어떻게든 지속하려는 노력에 대해 굉장히 무심하기도 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에게 선뜻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도 고작 그게 뭐라고 꽤나 힘들어하는 편이다. 그건 아직도 다르지 않아서 훈련장에 설령 아는 친구가 있더라도 마주치지 않기를, 아니면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조용히 넘어가기를 원했다. 그건 두려움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모자라고 성가심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감정이다. 게다가 예전 친구 중 누군가와 한번 아는 척을 하게 된다면 혹시나 그가 지금의 내 맘에 안 들더라도 4일 내내 같이 다녀야 할 판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굳이 안 봐도 그만인, 딱 그 정도의 문제였다. 가끔은 대화보단 침묵이, 사랑보단 무관심이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냐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게.

그런 기대 반 걱정 반의 내 생각은 훈련 첫째 날에 바로 현실로 다가왔다. 더운 날씨에 지쳐 온갖 욕을 찰지게 해대며 실내 강의장에 들어와 앉았는데, 내 옆자리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같이 다니던 반 친구들 중 한 명이다. 친했던 친구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생각했는데, 11년은 사람을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바꾸기엔 다소 모자란 시간일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기억 속의 그 친구는 정말 착하고, 많이 순했었다. 남학교는 어느 정도 야생과 닮은 구석들이 있다.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발톱을 잘 갈아 세우고 있어야 했는데 그 애는 그게 있기는 한 건가 싶은, 풀만 먹고살던 친구였다. 애써 앞만 보며 귀찮을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나에게 그 친구가 먼저 아는 척을 해 왔다. 나를 만난 것이 놀라운 듯, 새삼 반가운 듯 말을 거는데 나는 그를 진작에 알아보았음에도 바로 생각이 나지 않아 기억을 더듬는 척했다. 머릿속으로는 그 짧은 시간에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내겐 인사 하나 건네고 누군가를 반갑게 맞는 게 참 어려운 일인데, 너에게도 어려운 일일 수 있을 텐데, 그걸 이렇게 간단하게 해내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한편으로는 고마웠고, 나도 사실 그때 그 친구에게 내색한 것보다는 훨씬 반가웠다.

내가 가졌던 걱정이 괜한 것이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연락을 망설이던 오랜 시간들을 후회해야 하는 게 맞다고 입증하듯, 11년 만에 이런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게 된 그 친구는 나를 너무나 편하게 대했다. 나도 금세 그동안의 공백을 잊은 양 바로 얼마 전에 봤던 것처럼 능청스레 그를 대했다. 지겨운 건 기본이고 날씨 때문에 유난히 힘들던 훈련 중에 괜찮은 말동무가 있다는 건 생각보다 더 큰 위안이다. 군부대로 출퇴근하던 4일간 한참 어릴 때처럼 같이 다녔다. 지난 시간의 추억팔이는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딱 알맞았다. 그에게서 잊고 지내던 수많은 이름들을 다시 들었다. 그들에 대한 기억들과, 지금 그들이 무얼 하고 지내는지 이야기하며 그들의 삶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을 그 친구와 같이 보내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처음의 반가움과 어린 날에 대한 향수가 지난 후에는, 우리의 대화 중간에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커다란 이질감이 자꾸 끼어들어 왔다. 함께했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같이 웃을 땐 우린 분명 같은 세상에 있었지만 지금의 삶을, 이 현실에 실재하는 각자의 고민들과 삶의 굴곡들을 드러내어 나누기엔 서로가 낑낑대며 덧붙여야 할 말들이 너무나 많았다. 서로에 대해 숨길 것도 별로 없이 지내던 시간은 한참 전에 다 지나고 말았다. 이젠 우린 서로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 나는 퇴사 이후의 삶과 고민들을 애써 말하려 하지 않았고, 그 친구 역시 무슨 시험을 준비한다는 말 너머의 자세한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는 듯했다. 더욱 혼란스러웠던 건 하루하루 지날수록 난 그 친구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대해야 하는지 판단하기도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전처럼 붙어 다니던 친구로 대해야 하는 건지,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었지만 또 볼 일은 없을 듯한 옛 친구처럼 대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이번을 계기로 다시 자주 만날지도 모를 사람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런 적은 나도 처음이었으니까. 이런 걸 누가 가르쳐주지는 않으니까. 시간이 갈수록 느껴지던, 어디서부터 스며나오는 건지 모를 그 이질감. 그건 이미 서로가 너무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커다란 간극은 인력으로는 메울 수 없어 보였다.

긴 훈련의 마지막 날. 그 친구는 끝나고 나서 무얼 하느냐 내게 물었고, 난 별다른 건 없고 내일 오전 중에 서울로 올라갈 것이라 답했다. 난 한시라도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친구는 할 얘기가 아직 더 있는 눈치였다. 끝나고 같이 술을 한잔했으면 좋겠다 말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난 별로 그러고는 싶지 않았다. 이야기는 그동안 충분히 했다. 이미 너무나도 다른 각자의 세상에 우리는 산다. 네가 입은 구형 군복과 내가 입은 신형 군복이 보이는 이 극명한 시각적 차이만큼이나 우린 이미 다른 세상이다. 한여름의 이 우연한 사건이, 일상에서 억지로 벗어나게 된 며칠이 현실보다는 추억을 우선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마지막 날의 해가 이미 지고 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끔 어색한 사람들과 술을 마시게 될 일이 있을 때, 나는 일부러 많이 마셔 적당히 취하고는 한다. 그러고 나면 맨정신일 때보다는 앉아 있을 만하니까. 너는 어떨지 모르지만, 너와 술을 마시면 나는 내가 자주 그러듯 일부러 많이 마셔 적당히 취할 것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너에게도 그럴 것 같았다. 그 상태로 깊은 대화보다는 중심을 비껴가며 겉도는 대화를 나눌 것이고, 한때 같은 세상에 살았던 기억들을, 지금은 별 소용없는 기억들의 겉만 한 번 더 핥다가 싱겁게 끝나겠지. 서로 마음 깊은 것들을 다 털어놓고 그러기엔, 지금에 와서 다시 각별한 친구가 되기에는 우린 각자 다른 방향으로 많이 걸었다. 지나치게 긴 시간 만에 만났다. 그동안에 서로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기 위해 필요한 설명들이 감당이 안 될 만큼 많아졌다. 오늘은 좀 피곤하다고, 안되겠다고 답했다. 친구는 못내 아쉬워했다. 다음에 보자. 그러자 꼭.

며칠이나 되었다고 나름대로 익숙해진 군부대의 위병소를 같이 나오는데 친구가 사진을 한 장 찍자 했다. 더워 죽을 것 같은데 전투복 상의를 서둘러 다시 챙겨 입고 따가운 햇볕 아래서 사진을 두 방 연속으로 찍었다. 그래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데 이것 하나 못 해줄까. 같이 걸은 지 얼마 안 되어 마주한 시골 느낌 물씬 나는 갈림길에서 우린 짧은 인사를 나눴다. 난 그날 저녁 서울로 출발하는 표를 예매했다.

다음에 술 한잔 하자는 기약 없는 약속. 묻고 싶다. 너는 곧 그런 날이 있을 거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여전히 순진한 구석이 정말 많이 남아있던 너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난 선뜻 연락하기 어려워할 것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 그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미 너와 나는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은 채로 이유도 없이 만나기는 어려운 사이다. 다시 만나려면 한번의 우연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또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할지 난 쉽게 짐작할 수 없다. 내년 예비군 훈련을 내가 혹시라도 또다시 이곳에서 하게 된다면 그때서나 좀 보게 될까. 우리가 11년 만에 보게 된 건 그만한 까닭이 있을지도 몰라. 너와 나의 세상 사이에 걸어서는 11년이나 걸리는 광활한 넓이가 생겨서인지도 몰라. 그 거리를 애써 줄이려고 서로 어떤 노력이든 굳이 해본 적은 없는 딱 그만큼의 사이였던 거야. 다음 만남까지 어쩌면 또 다른 11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날 밤 회기동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연 후에야 난 평소의 삶으로 돌아왔다. 집을 오래 비우고 난 뒤라서 청소를 하고 싶었다. 며칠을 견디던 따가운 햇볕 대신 부드러운 조명 아래서 바닥을 쓸고, 걸레를 빨아 닦았다. 대화가 없는 집 안에 머무는 무거운 침묵만큼 차분해진 상태로 생각했다. 왜 난 늘 이런 식인 건지, 내 모자란 친절함과 살가움. 모난 사교성. 지나친 차가움. 내가 싫다고 술 한잔 같이 해 주지 못하는 이기심. 그다지 변하지도 않아 더욱 마음에 걸리는 옛 친구에 대한 미안함에 그제서야 괜히 서글펐다.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게 맞겠지만, 오래 아쉬워해야 할 일은 있었다. 그날은 일찍 잠에 들었다. 다음날 평소와 같은 하루 속에서 일어났을 때, 이미 내 관심 중에서 그 친구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나 역시도 이번 생이 처음이라서 긴 시간 잊고 살던 친구와 뜻밖의 만남이 생길 때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의 행동과 태도인지 미리 알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앞으로 몇 번은 더 있겠지. 난 그때마다 그 친구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추억과 이질감을, 과거와 현실을 이번보다는 더 균형을 잘 맞추며 저울질해보려 할 것이다. 나이를 한 살씩 먹을수록 고마워해야 할 사람, 미안해해야 할 사람이 조금씩 많아진다. 간혹 그 둘 모두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답변] 일반부/생활글

  • 작성자전체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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